
시상식을 보고 나서 오히려 영화가 싫어진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이번 제46회 청룡영화상을 보고 정확히 그런 기분을 느꼈습니다. 한 해 동안 영화를 꽤 챙겨 본 편인데, 시상식이 끝나고 나니 그 영화들에 대한 기억마저 퇴색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그 영화들을 실제로 만든 사람들이 무대 위에 한 명도 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스태프 홀대, 숫자로 보면 더 선명해집니다
이번 시상식에서 촬영상, 편집상, 각본상, 기술상, 미술상, 음악상, 총 여섯 개 분야의 스태프 부문을 합산한 방송 분량은 5~6분 남짓이었습니다. 반면 축하 공연은 이찬혁, 화사, 보이넥스트도어, 라포엠 등 여러 가수의 무대를 합치면 25 ~ 30분에 육박했습니다. 저도 이 가수들 좋아하는데, 이 사람들이 영화상에서 왜 이렇게 긴 시간을 차지해야 하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더 결정적인 문제는 수상자들이 현장 무대에 서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스태프 부문 전체가 VCR, 즉 사전 녹화 방송으로만 진행되었습니다. VCR 방식이란 생방송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수상자를 내정해 소감을 녹화해 두는 방식으로, 현장에서 이름이 불리고 무대에 오르는 과정 자체가 사라집니다. 후보 소개는 포스터 다섯 장을 1초 남짓 화면에 띄우는 것으로 끝났고, 어떤 작품이 왜 후보에 올랐는지 설명하는 클립은 단 한 컷도 없었습니다. 배우 부문은 해당 배우의 명연기 클립을 모아 소개하면서 말이죠.
영화진흥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국내 상업 영화 한 편의 평균 제작비는 약 70억 원 수준이며, 그 중 스태프 인건비가 전체의 상당 부분을 차지합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이 돈을 쓰고 이 사람들을 현장에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 저는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오스카와의 비교, 포맷의 차이가 아닌 철학의 차이입니다
오스카와 비교하면 단순히 예산 차이나 방송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게 분명해집니다. 아카데미 시상식(Academy Awards)은 각 부문을 소개할 때 해당 분야의 개념 자체를 관객에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여기서 아카데미 시상식이란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가 주관하는 영화 시상식으로, 영화 산업의 각 기술 분야에 동등한 비중을 두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배우 벤 스틸러가 미술상 시상자로 나와서 무대 장치 고장 상황을 미술 개념과 연결지어 유머로 풀어낸 장면이나, 특수분장 시상 때 직접 특수분장을 하고 등장하는 퍼포먼스는 단순한 쇼가 아닙니다. 프로덕션 디자인(Production Design)이나 특수분장(Special Makeup and Hairstyling) 같은 기술 분야가 생소한 일반 시청자도 "아, 저 분야가 영화에서 이런 역할을 하는구나"라고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는 구조입니다.
각본상 소개 방식도 인상적입니다. 후보 각본의 일부 텍스트와 그 텍스트가 영상으로 구현된 장면을 나란히 보여줍니다. 시나리오(Scenario), 즉 영화의 설계도에 해당하는 각본이 카메라와 배우를 거쳐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방식을 처음 봤을 때 "이래서 시상식이 존재해야 하는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우리 청룡영화상은 같은 각본상을 두고 포스터 이미지만 화면에 올렸습니다.
기술 분야를 홀대하면, 기술이 자라지 않습니다
이건 시상식 포맷의 문제를 넘어 산업 구조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시각효과(VFX), 즉 컴퓨터 그래픽과 합성 기술을 통해 실제처럼 보이게 만드는 분야가 한국 영화계에서 얼마나 인정받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옵니다.
영화사에서 기술 혁신이 산업 전체를 바꾼 사례를 보면 그 중요성이 더 뚜렷해집니다.
- 스톱 모션(Stop Motion): 킹콩처럼 실제로 만들 수 없는 피사체를 한 프레임씩 움직여 촬영하는 기법으로, 괴수 영화 장르 자체를 탄생시켰습니다.
- 애니마트로닉스(Animatronics): 기계 장치로 작동하는 실물 크기 모형 기술로, 에이리언과 E.T. 같은 크리처 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 CGI(Computer-Generated Imagery): 컴퓨터로 완전히 만들어낸 이미지를 뜻하며, 쥬라기공원의 공룡 장면으로 처음 대중의 눈을 사로잡았고 이후 토이스토리로 장편 애니메이션 전체를 CG로 구현하는 시대를 열었습니다.
- 모션 캡처(Motion Capture): 실제 배우의 움직임을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해 가상 캐릭터에 입히는 기술로, 아바타가 이 방식의 상업적 정점을 보여줬습니다.
홍콩 영화의 와이어 액션도, 일본 특수촬영물(이른바 특촬, 特撮)의 미니어처 기술도 시상식과 비평계의 꾸준한 조명 속에서 전수되고 발전했습니다. 최근 넷플릭스 영화 신칸센 대폭파에서도 미니어처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이 장면을 보다가 옆에 앉은 아내가 "몰입 깨진다"고 핀잔을 줬을 정도로 저는 눈에 뻔히 보이면서도 그 기술이 반가웠습니다. 기술이 쌓이면 그 자체로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한국 영화에서 어떤 특정 기술이 중심이 되어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사례를 떠올려 보시겠습니까. 저는 아직 그 빈칸을 채울 작품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3 영화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영화 스태프 중 기술 분야 종사자의 평균 임금과 고용 안정성이 연출·촬영 등 주요 파트에 비해 현저히 낮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시상식에서조차 이들을 무대에 부르지 않는 관행이 이 격차와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시상식은 쇼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한 무대입니다
시청률이 낮아지는 건 맞습니다. 그 문제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시청률이 낮아지는 이유가 과연 "스태프 소개를 길게 해서"일까요? 저는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시상식이 영화와 점점 상관없는 콘텐츠로 채워질수록, 굳이 본방사수를 해야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오스카도 시청률 하락이라는 같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스카는 공연 시간을 늘리는 방향 대신 각 부문 소개의 완성도를 높이는 방향을 선택했습니다. 공식 유튜브 채널에 각본상 후보작의 텍스트와 영상을 함께 편집한 쇼츠 콘텐츠를 올리고, 시상식 후에도 부문별 영상을 빠르게 업로드합니다. 콘텐츠의 본질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품은 학생이 시상식을 보면서 "저 무대에 언젠가 서고 싶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배우뿐 아니라 각본을 쓴 사람, 편집을 한 사람, 촬영을 한 사람 모두가 그 무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시상식이 보여줘야 합니다. 그게 시상식이 방송 편성을 통해 할 수 있는 가장 실질적인 산업 기여입니다.
이번 청룡영화상을 보면서 제가 느낀 건 분노보다는 허탈함에 가까웠습니다. 비판하고 응원하고 기대해도 소용이 없다는 게 아니라, 적어도 다음 해에는 스태프 한 명이라도 무대 위에 올라서는 장면을 보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그게 너무 큰 요구인지는, 내년 시상식이 알려 줄 것입니다.